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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푸르른 날’- 서정주
나-야
2010. 5. 4. 09:15
‘푸르른 날’- 서정주(1915∼2000)
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
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
저기 저기 저, 가을 꽃자리
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
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
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
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!
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?
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
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
천지가 푸른 신록의 계절에도, 눈부신 햇살과 단풍의 계절에도 이 시만 보면 그리움 환하게 물들어온다. 환한 햇살 앙다문 여린 잎새 그늘처럼, 단풍 그늘처럼. 한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‘저기 저기 저, 가을 꽃자리/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’에 이르면 5음보 율격(律格)과 풍격(風格)에 절로 탄성 터진다. 한글날, 한글의 맛과 멋과 오묘함 한껏 드러내기 위해 오늘도 말 다듬고 있을 시인들께 경하 드린다. <이경철·문학평론가>